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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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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20.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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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란 금을 본위통화로서 지폐가치의 안정을 도모하는 통화제도입니다. 1816년 영국에서 시작되어 19세기 말 국제금본위제가 성립되었으나, 1차대전 전후에 정지 및 시행이 반복되었으며, 현재는 관리통화제도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금본위제의 의미

금은 광채가 있고 부식되기 어려우며 전성이 크고(얇게 늘릴 수 있습니다), 분할할 수도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옛날부터 무엇이든 교환 가능했기 때문에 주로 주화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 금화를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을 바로 금본위제라고 합니다. 금본위제 하에서 발행되는 지폐는 일반적으로 각국 중앙은행(발권은행, 일본에서는 일본은행)에서 발행하는 은행권이며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화나 금괴를 교환하기 위해 발행되는 태환지폐(금과 교환할 수 있습니다는 의미)입니다.

 

지폐가 신용되는 근거는 본래 금본위제의 태환제도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금본위제도 하에서는 각국의 지폐량은 금 보유량으로 제약되게 됩니다. 금본위제에서는 수출입의 차액은 금으로 지불되고 조절됩니다. 무역이 적자가 되면 금이 국외로 빠져나가고, 그렇게 되면 유출된 금만큼 국내 통화량은 감소해 국내 소득은 줄어 물가가 내려가게 됩니다. 물가가 내려가면 수입은 줄고 수출이 늘어나 무역적자는 해소됩니다. 금본위제에는 이러한 메커니즘이 있는데, 그것을 금본위제의 자동조절작용이라고 합니다.

금본위제의 성립

금본위제는 1816년에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44년에 잉글랜드 은행이 금과 교환 가능한 파운드를 태환지폐(금 1온스=3파운드 17실링 10펜스)로 발행하여 19세기 말에 런던을 중심으로 한 국제금본위제=파운드 체제로 확립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인도 등 광대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고, 가장 안정된 재정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영국 경제의 헤게모니(주도권) 확립 이유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는 '국제금 본위제=파운드 체제'를 지탱하는 최대의 안정 요인이었습니다. 19세기까지의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서 세계경제를 주도했지만, 20세기에는 공업생산력에서는 미국, 독일에 뒤졌지만 국제금본위제=파운드 체제를 통해 '세계의 은행'으로서 세계자본주의를 주도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금본위제 

금본위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일시 정지되었으나, 전후 경제 부흥에 따라 1925년 영국을 비롯한 각국이 금본위제로 복귀했습니다. 금본위제에 의해 각국의 통화는 금과 등가 관계에 있게 되어, 서로 교환이 자유롭게 행해지는 것이 보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이 국가적 위신에 집착하여 이전 환율인 1파운드=4.86달러로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바람에 영국의 섬유, 기계, 석탄 등 전통산업이 이미 쇠퇴하고 국제경쟁력을 잃고 있는 현실과 맞지 않아 수출이 감소하여 무역수지가 악화되고 자금이 미국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금융완화를 추진한 것과 맞물려 전 세계 자본이 미국으로 과도하게 집중되어 미국 주식시장이 폭주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세계 공황과 금본위제의 붕괴 

1920년 후반부터 세계적인 금융 불안이 확산되어, 1931년부터 33년 사이 차례차례로 여러 나라들이 금본위제에서 이탈합니다. 우선 독일의 은행 파산으로 1931년 9월 영국이 금 본위제 정지를 단행했고, 영국과의 관계가 깊은 포르투갈이나 북유럽 역시 금본위제를 이탈합니다. 나아가 1933년 3월 루즈벨트 대통령의 미국도 금본위제를 이탈하여, 세계의 금본위제는 붕괴되었습니다. 한편, 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는 금본위제를 유지해 금블록(프랑-블록)이라는 일종의 블록 경제권을 형성합니다.

런던 세계경제회의 

전세계 동시불황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각국이 협력하기 위해 1933년 6월 12일부터 런던세계통화경제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64개국 대표 740명이 참석해 세계적 규모의 환율과 경제에 관한 국제회의로 세계공황 탈출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각국이 기대하며 회의 진행 상황을 주시했습니다.

 

6월 30일에 프랑스, 이탈리아 등 이른바 금 블록 국가들이 금 본위국은 금 본위를 고수할 것을 선언하며, 금 본위 이탈국은 훗날 금 본위로 복귀할 의도가 있음을 선언하는 취지의 환율공동선언을 작성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동참을 요청했으나 루즈벨트는 선언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가 런던에서 금본위제 복귀선언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것은 미국 내 불황대책을 우선하고 달러의 인위적, 적극적 평가절하로 인플레이션을 야기해 물가상승을 통한 경기회복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로즈벨트가 이처럼 국내 경제 부흥을 위한 뉴딜정책을 우선하는 바람에 회의가 결렬되고, 시대는 블록 경제 형성으로 이어져 결국 제2차 세계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통화제도는 금본위제를 대신해 중앙은행의 관리 하에 지폐가 발행되는 관리통화제도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관리통화제도에서는 지폐는 불환지폐로 발행됩니다. 지폐의 발행량은 금 보유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중앙은행이 가진 자산을 근거로 발행됩니다.

평가절하 경쟁

세계통화제도로서의 금본위제가 붕괴된 후, 자원이 풍부한 미국은 뉴딜정책을 통해 국내구매력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영국·프랑스는 블록경제권을 형성하고 보호주의를 취하게 되었고 각국은 평가절하(자국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림)를 함으로써 수출을 많이 하여 국내산업을 지키기 위해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국내 노동자에 대한 저임금 형태로 고통을 가중시켜, 세계 전체의 구매력을 저감시키고, 또한 자원이나 싼 노동력을 요구해 영토·세력권의 확대를 도모하는 전쟁의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고정환율 제도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연합국을 주체로 세계경제의 국제공조체제인 브레튼우즈체제를 만들어 미국의 달러를 유일한 기준통화로 삼고 평가절하 경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정환율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또 국제수지 악화로 한 나라의 경제가 파탄이나서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 것을 반성하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을 설립해 통화 안정과 경제 부흥을 도모했습니다. 

변동환율제 진입

브레턴우즈 체제는 1973년 환율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이행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그 배경에는 미국 경제의 후퇴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나 사회보장 정책 확충 등에서 지출이 증가하여 재정적자에 빠졌습니다. 또한 일본과 서유럽의 경제가 부흥하면서 미국의 수출은 감소하고, 수입이 초과하여 무역적자가 증대되었습니다. 이에  미국 금 유출이 증가하자,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달러 태환정지, 10%의 수입과징금 부과를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달러 태환 정지는 금본위제를 폐지한다는 말과 일맥 상통합니다. 이에 따라 1973년에 고정환율제도는 중지되고 변동환율제로 전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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